국내 최초 ‘다이너마이트’ 생산 성공…화약 국산화 기틀 다져

경제 재건 위해 생필품 대신 ‘화약’ 택했다
IMF ‘위기 돌파구로 삼아’ 그룹체질 개선


[스페셜경제=선다혜 기자]지금의 한화그룹이 만들어지는데 뿌리가 됐던 것은 고(故)김종희 회장이 가졌던 화약에 대한 집념이었다. 故 김 회장은 일제 강점기였던 지난 1942년 조선화약공판주식회사 입사로 화약과 인연을 맺는다.


이 일로 그는 당시만 해도 국내에서 생소했던 화약 기술자로 거듭났으며, 지금 한화그룹의 모태가 되는 ‘한국화약 주식회사’를 설립하는 기반이 된다.


고 김 전 회장이 타계한 후에는 아들인 김승연 회장이 한화그룹을 물려받는다. 김 회장은 ‘한국화약’이라는 사명을 줄여 지금의 ‘한화’로 바꾸었으며, 중화학 중심이었던 그룹의 체질개선에까지 나선다. 이를 통해서 금융, 유통, 레저 등에 다양한 분야에 사업을 확장함으로서 지금의 한화의 모습을 갖추게 된다.


‘다이너마이트 킴’으로 불린 고(故) 김종희 회장


고 김 전 회장은 광복 이후 국내 화약산업의 개척자가 되겠다는 신념 하나로 화약관리사업체를 운영하다, 1952년에 ‘조선화약공판’을 사들여 ‘한국화약주식회사’를 설립한다.


김 회장이 한국화약을 설립했을 때는 6?25전쟁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시기였기에, 사람들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했던 것은 ‘생활필수품’이었다. 당장 먹고사는 문제가 빠듯했기에 ‘화약’ 수입하는 것보다 비료나 설탕 등의 생활필수품을 들여와 판매하는 게 사업가 입장에서는 훨씬 이득이 됐다. 때문에 한국화약 내부에서도 이윤을 위해서는 설탕 등 생활필수품 수입 사업을 하자는 의견도 여러 차례 제기됐다.


그럼에도 고 김 회장은 생활필수품을 수입하는 것에는 눈길도 주지 않았으며, 오로지 화약을 수입하는 데만 열을 올렸다. 이처럼 고 김 회장이 당장 돈이 될 수 있는 사업을 뒤로하고 ‘화약’을 우선시 했던 이유는, 전쟁으로 인해 폐허가 나라의 기간산업을 다지는 데 무엇보다 화약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특히 당시는 국내산 ‘화약’은 존재하지 않았고 화약은 오로지 ‘수입’에만 의존하는 상황이었다. 때문에 고 김 회장은 화약 수입을 포기하고 생필품 수입에 뛰어들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이러한 집념으로 고 김 회장은 화약을 수입하는 것을 넘어서, 화약 자체 생산에 도전한다. 그리고 1956년 4월 조선유지㈜로부터 인천화약공장을 인수하고, 4년 뒤인 1959년 국내 최초로 다이너마이트 생산에 성공한다. 이로 인해서 그는 한국의 노벨, 다이너마이트 킴이라는 별명을 얻는다.


이렇게 완성된 다이너마이트는 급변의 시기였던 1960~70년 고속도로, 부두, 광산 공사 등에 사용되면서 국토재건과 산업기반 조성에 일조한다. 이후 1960~70년대에 걸쳐 석유화학 금융업, 증권업, 건설, 등 ‘사업다각화’로 지금의 한화그룹의 기반을 다졌다. 이 때 당시 지금의 빙그레의 전신인 대일유업㈜도 한국화약으로 편입됐다.


승승장구하던 김 회장에게도 큰 역경이 있었다. 회사가 고속성장을 거듭하던 1977년 화약을 싣고 가던 기차가 폭발하는 일명 ‘이리역 폭발사고’로 인해, 1400여명의 사상자와 약 61억원의 재산 피해가 발생하게 됐다.


이 때 고 김 회장은 사고가 난 바로 다음날 발 빠르게 대국민 사과성명을 발표하고 피해 복구에 수많은 직원들을 투입했다. 뿐만 아니라 전 재산 90억원도 피해 보상금으로 내놓고, 발생한 피해에 대해서 사죄하면서 그의 경영철학이었던 ‘정직과 책임’을 다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로 인해서 한국화약과 고 김 전 회장에 쏠렸던 비판 여론도 수그러들게 된다.


무엇보다 나라의 재건을 위해서 화약을 포기하지 않았던 고 김 전 회장은 타계한 지금도 한국 산업의 기반을 다졌던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29세 최연소 총수 김승연 회장…추진력·판단력 ‘기업’


김승연 회장은 현재까지도 국내에서 가장 ‘최연소 회장’ 타이틀을 단 인물이다. 그가 한화그룹 회장으로 취임했던 나이는 당시 29세였다. 1981년 창업주였던 고 김 전 회장이 과로와 병환으로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면서, 경영수업을 받던 중 회장직 승계를 받게 된다.


젊은 나이에 거대 기업을 꾸려나가야 할 김 회장에 대한 우려는 만만치 않았다. 보통의 오너 2세들이 경영수업을 통해서 단계적으로 경험을 쌓고 자신의 영역을 넓혀나가는, 코스가 없이 바로 ‘그룹 회장’직에 올랐기 때문이었다. 그가 어느 정도의 경영능력을 갖추고 있는지 판단조차 서지 않을 때였다.


하지만 김 회장은 이 같은 우려의 시선을 정확한 판단능력과 추진력을 통해서 거둬낸다. 특히 그가 주목을 받았던 것은 지난 1997년 발생한 외환위기 사태 때였다. 당시 많은 기업들이 ‘IMF 쓰나미’가 몰려왔음에도 구조조정을 실행하지 못하면서 도미노처럼 하나둘씩 넘어가거나, 핵심 계열사들을 헐값에 매각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이에 반해서 김 회장은 이러한 위기가 닥치기 무섭게 ▲한화바스프우레탄 ▲한화NSK정밀▲한화GKN ▲한화기계 허브아이 베어링부분 ▲SKF한화자동차부품 ▲한화자동차부품 등 외국사들과의 합작법인들의 지분을 합작사에게 넘겼으며, 계열사였던 경향신문과 빙그레를 분리한다.


심지어 김 회장은 구조조정을 통해 위기만 극복한 것이 아니라 이를 ‘기회’로 삼아서 그룹 체질개선에도 나선다. 이 때까지만 해도 한화그룹은 ‘중화학’ 중심이었지만, 대규모 M&A 등을 통해서 ▲제조업 ▲유통 ▲레저 ▲금융 등으로 그룹을 개편한다.


이 같은 한화의 구조조정에서는 ‘정부’나 ‘채권단’의 개입은 없었다. 김 회장의 판단력과 추진력을 기반으로 그룹 내 자발적으로 이뤄져 피해를 최소화했다. 더욱이 매각이 진행된 계열사들 역시 합작사에게 넘김으로서 직원들의 고용 승계 문제 역시도 자연스럽게 해결했다.


한화그룹의 구조조정은 당시 김대중 전 대통령 역시 찬사를 아끼지 않을 정도였으며, 재계에서도 인정하는 구조조정의 가장 대표적인 모범사례로 남게 됐다.


IMF 이후에도 김 회장은 적극적인 경영행보를 보였다. 그는 2001년과 2002년에 각각 대우전자 방산부문과 대한생명을 인수한다. 그는 대우전자 방산부문을 인수함으로서 첨단정밀 무기 제조기술을 확보함으로서 ‘무기제조력’의 경쟁력을 높였다.


이어 2002년 당시 누적손실 2조 3000억원을 기록하면서 국·내외 기업 어디도 인수에 나서지 않았던 대한생명(현 한화생명)을 사들여, 3년 만에 경영 정상화를 일궈낸다. 아울러 현재는 보험업계 2위 기업으로까지 성장시킴으로서, 금융사업을 그룹의 새로운 성장동력으로 삼았다.


또한 최근에는 공정위에게 지적받은 ‘일감 몰아주기’ 의혹을 해소하기 위해 과감 없이 새로운 개편안을 내놓았으며, 이와 함께 새로운 조직개편안도 내놓았다. 이번에도 역시 김 회장의 판단력이 빛을 발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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