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경제=권도윤 기자]여행(旅行)의 사전적 정의는 ‘일이나 유람을 목적으로 다른 고장이나 외국에 가는 일’이다.


하지만 실제 여행이란 ‘언어’라는 수단으로 온전히 표현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사전적 의미를 넘어서는 ‘무언가’가 분명 존재하기 때문이다.


실제 행동에 옮기기에 앞서 계획하고 준비하는 단계에서의 막연한 설레임, 그리고 매 순간마다 찾아오는 선택의 고통, 그럼에도 ‘항해’를 지속하게 하는 알 수 없는 힘.


그리고 모든 여정을 마친 후 원래 있던 것들의 소중함을 느끼게 만든다. 아련하면서도 가슴 한 구석이 뻐근해지는 기분. 이 모든 과정이 여행이고, 이를 경험하기 위해 우리는 또 다시 여행을 결심한다. <편집자주>


안나푸르나의 명암


아름다운 안나푸르나, 이런 곳에서 사는 사람들의 마음은 어떨까? 아무런 욕심없이 살 수 있지 않을까?


아이러니하게도 눈부시게 아름다운 안나푸르나에서 그 설산에 쌓인 눈보다 더 차가운 빈부격차와 가난을 보았다.


사실 ABC까지는 전문적인 등산 교육이나 장비가 없이도 갈 수 있는 길이었다. 고산병만 없다면 북한산보다도 쉽게 다녀올 수 있다. 심지어 포터들은 큰 배낭을 세 개나 짊어지고 오르기도 하며 산악회에서 단체로 오신 한국 할머니들도 오르내린다. 그리 험하지 않기 때문에 일정만 잘 짜면 초보자도 누구나 다닐 수 있는 길이었다.


하지만 고어텍스에 최신형 등산화를 갖추고 다니는 등산객은 대부분 한국인이다. 특히 일부는 자신의 짐은 모조리 포터에게 맡긴 채 뒷동산 가듯이 걸어 올라간다. 반면 포터는 다 떨어진 면바지에 운동화를 신고서 40kg에 달하는 짐을 지고 길을 안내한다. 마을 주민들은 짐이 없으면 속칭 ‘쪼리’라고 부르는 플립플롭을 신고도 해발 3,000m 정도는 대수롭지 않게 올라간다.


아준이라는 포터와 이야기를 나눠보니 학비를 벌기 위해 나온 대학생이었다. 하루종일 짐을 나르고 받는 돈은 채 1만원이 안된다. 그나마 직업 소개소에서 수수료를 공제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직업으로 하시는 분들은 아버지뻘이다.


매일같이 보는 풍경을 위해 날아온 외국인들이 단지 세끼 밥값으로 흔쾌히 지불하는 비용은 포터가 자기 몸무게의 절반가량을 짊어지고 하루종일 산을 올라야 받는 금액이다.


그들은 과연 무슨 생각을 할까? 우리를 호구로 보고 돈 생겼다고 좋아할까? 아니면 서글픔을 느낄까? 차마 물어볼 수도 없었다. 묵묵히 산을 오르는 뒷모습을 곱씹을 뿐이다.


더욱 가슴 아픈건 등산객만 보면 “스위트?”, “캔디?” 하면서 다가오는 꼬마들이다. 처음에 누군가가 꼬마들이 귀엽다고 생각없이 던져줬을 것이다. 한번 그 달콤한 맛을 본 꼬마는 외국인만 보면 사탕을 요구한다. 아무 욕심없이 살 것 같은 이들에게, 등산객들이 구걸하는 법을 가르쳤다. 먹어도 배부르지도 않은 그깟 사탕을 주고 자존심을 빼앗아갔다.


낯선 꼬마들에게 사탕 몇 개 쥐어주고 자비를 베풀었다고 스스로를 괜찮은 놈이라 대견하게 여기며 흐뭇해하는게 과연 옳은 것인가? 아니면 그깟 사탕하나가 아까워서 교육적으로 좋지 않니 어쩌니 자기합리화를 하는게 떳떳한 것인가?


생각은 끝없이 이어지고 그 앞에서 한없이 초라해진다. 나는 아무런 답을 구할 수 없었다. 다만 등산 첫날 본 쉬리 비레탄티 초등학교가 떠올랐을 뿐이다. 세계 최초로 8,000m 16좌를 등정하면서 반평생을 바친 히말라야. 그가 사랑하던 산지의 아이들을 위해 학교를 세운 엄홍길 대장. 태극기가 휘날리는 학교를 바라보며 처음에는 한국인임이 자랑스러웠으나 산을 내려오면서 생각하는 학교는 엄홍길 대장을 인간적으로 이해하게 만들었다.


포카라로 돌아왔으나 안나푸르나에 미련이 떠나지 않았서 라운딩 코스를 걸어보기로 했다.


다시 안나푸르나를 향해


나흘간 70.5km을 걸어 피상(Pisang·3,370m)이라는 마을에 도착했다. 이제 고산병에 대비해서 천천히 고도를 높여야 한다. 일찍 걸음을 마치고 쉬기로 했다. 짐을 내려두고 마을 구경에 나섰다. 이곳에는 글이 새겨진 원통을 배열해 놓은 물건이 종종 보인다. 마니차라고 하는데 티베트 불교에서 불경을 보관하는 도구로 이것을 돌리면 불경을 한 번 읽은 효과가 난다고 한다. 문맹자를 위한 배려일까? 마니차를 열심히 돌려 봤지만 나는 별 깨달음을 얻지 못했다.


산에서는 힌두교 문화보다는 불교를 중심으로 한 티베트의 분위기가 더 강하다. 국경을 넘으면 티베트이며 나라 잃은 티베트 난민들이 네팔과 인도에 많이 살고 있다고 한다.


시간이 남았으니 고산지대 적응도 하고 다음날 걸을 길도 확인할 겸 조깅을 해보기로 했다. 산악 구보는 아주 짜릿한 경험이었다. 심장과 폐가 터질 듯 숨이 차지만 조금만 속도를 줄이면 더 이상 상쾌할 수 없다. 공기는 깨끗하고 호수를 낀 길도 운치있다. 고개를 들면 기와지붕처럼 보이는 설산이 나를 반긴다.


4,000m대를 넘어서자 눈이 깔려있다. 하이 캠프(High Camp·4,925m)에 머문 날은 숨이 많이 찼고 강풍에 눈까지 쏟아져서 힘들었다. 약간의 두통도 느껴지고 많이 춥다. 젖은 옷을 널어놓고 침낭 속에서 덜덜 떨며 가까스로 잠들었다.


자고 일어나도 머리는 계속 아프다. 눈은 그쳤으나 1m 이상 쌓여 있어 걷기가 쉽지 않았다.마침내 토룽 라 고개 5,416m 고지에 도착했다. 토룽 라에 올라선 감격에 한시간 가량 머무른 후 하산길에 나섰다. 내리막은 오르막보다 훨씬 힘들었다. 서쪽이라 그런지 눈이 얼어 있었고 수차례 넘어지기를 반복한 끝에 간신히 흙을 밟을 수 있었다.


묵티나트(Muktinath, 3,760m)에서부터는 황무지가 이어졌고 토룽 라를 넘어서인지 의욕도 사라졌다. 길은 평탄하지만 지루하다. 사흘간 재미없는 길을 걷자 따또빠니(Tatopani)라는 온천 마을이 나타났다. 온천수에 몸을 뉘이고 휴식을 취했다.


다시 이곳을 밟을 수 있을까


다음날은 이유없이 허리가 끊어질 듯 아프다. 몸살 기운도 느껴지고 요의(尿意)가 있으나 마치 콜라색 같은 소변이 한두방울 나올 뿐이었다. 조금 걷다 바위에 드러눕길 반복하며 간신히 고레빠니(Ghorepani·2,860m)에 도착했다. 다음날도 요통과 요의는 여전했다. 마지막 고비인 푼힐을 향해 힘겹게 걸었다. 결국 일출은 놓쳤지만 최고의 전망 때문에 고생한 보람은 있었다.


ABC는 줌을 당긴 사진이라면 푼힐은 파노라마 사진이다. 마차푸챠레, 강가푸르나(Gangapurna·7,455m), 힌출리, 안나푸르나 남봉, 안나푸르나 I, 닐기리(Nilgiri, 7,061m), 담푸스 피크(Dhampus Peak, 6,012m)……. 지금까지 지나친 모든 산이 나를 반기듯 도열해있다. 마치 축구경기 후 선수 한명씩 돌아가며 악수하는 느낌이다. 하나하나 안내판과 대조해 보면서 산과 마지막 인사를 나눴다.


푼힐을 내려오면서 안나푸르나 라운딩이 끝났다. 포카라에서 며칠간 푹 쉬니 산에서 나를 괴롭히던 통증은 다 사라졌다. 의사 친구에게 물어보니 근육이 파괴되고 혈액에 칼륨이 녹아드는 운동유발성 횡문근융해증(Rhabdomyolysis) 증세라고 한다. 간단히 말하면 무리한 운동으로 생기는 병으로 심하면 사망할 수도 있다고 한다. 하산 후에는 증상이 사라졌다고 하니 걱정할 필요 없다면서 물을 많이 마시라고 한다. 고산병 증세인지는 알 수 없었다.


반 천리길의 안나푸르나를 돌아보면 기가막힌 경치와 즐거운 경험, 충분한 사색의 시간과 함께 마지막에는 병주고 약준 곳이다. 이제는 머릿속에 희미한 기억으로만 남은 안나푸르나. 언젠가 다시 한 번 밟을 수 있을까? 그래도 이 길에 서 있었다는 자체가 무한한 감사거리다.


이렇게 안나푸르나는 삶의 한 페이지에 굵은 획을 긋고 잠재 의식 속으로 사라졌다.


저작권자 © 스페셜경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