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경제=권도윤 기자]여행(旅行)의 사전적 정의는 ‘일이나 유람을 목적으로 다른 고장이나 외국에 가는 일’이다.


하지만 실제 여행이란 ‘언어’라는 수단으로 온전히 표현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사전적 의미를 넘어서는 ‘무언가’가 분명 존재하기 때문이다.


실제 행동에 옮기기에 앞서 계획하고 준비하는 단계에서의 막연한 설레임, 그리고 매 순간마다 찾아오는 선택의 고통, 그럼에도 ‘항해’를 지속하게 하는 알 수 없는 힘.


그리고 모든 여정을 마친 후 원래 있던 것들의 소중함을 느끼게 만든다. 아련하면서도 가슴 한 구석이 뻐근해지는 기분. 이 모든 과정이 여행이고, 이를 경험하기 위해 우리는 또 다시 여행을 결심한다. <편집자주>


안나푸르나 등산 코스는 크게 세가지로 나눠진다. 해발 3,193m에 위치한 푼힐(Poon Hill, 3,193m) 전망대는 2~3일 정도, 4,130m인 안나푸르나 베이스 캠프(Annapurna Base Camp·ABC)는 5~6일 가량 소모된다. 가장 긴 코스는 안나푸르나 산 일대를 한 바퀴 도는 라운딩 코스로 이동거리는 200km 정도이며 해발 5,416m인 토룽 라(Thorung La) 고개를 넘는다.


큰 부담 없는 ABC에 먼저 다녀오기로 했다. 자전거와 짐은 숙소에 맡겨두고 배낭 위주로 행장을 꾸렸다. 입산 허가증을 받고 1:62,500 산악지도, 비상식량, 고산병 약, 정수제, 취사도구 등을 준비했다.


해발 1,070m 나야푸르(Nayapur)라는 곳에서 등산을 시작했다. 나야푸르 초입에서는 산악인 엄홍길 대장이 설립한 쉬리 비레탄티 초등학교(Shree Biretanti Secondary School)가 등산객을 반기고 있었다.


안나푸르나라는 이름에 매우 긴장했으나 첫날 코스는 전혀 힘들지 않았다. 이 길은 험한 등산코스가 아니라 네팔인에게는 삶의 현장일 뿐이었다. 좁고 가파른 땅이지만 계단식 논을 만들어 삶을 일구어나가는 모습이 감탄을 자아낸다. 또한 가파른 오르막에는 돌계단을 만들어놓아서 쉽게 올라갈 수 있었다. 이런 험지에 길을 내고 삶을 이어온 네팔인들의 노력에 저절로 머리가 숙여졌다.


길은 편하고 작은 마을이 곳곳에 있어서 길 상태도 좋다. 마을에 물자 공급은 당나귀를 이용하거나 인력으로 도수운반한다. 특히 엄청난 부피의 짐을 짊어지고 산길을 오르는 네팔인들은 경이로울 정도였다. 그들의 지게는 어깨끈에 이마끈까지 달려있어 온 몸으로 무게를 감당해낸다.


한폭의 수묵화 같은 히말라야 야경


ABC 코스는 마을 뿐만 아니라 숙박업소(Lodge)도 많아 누구나 부담없이 다녀올 수 있다. 숙박비 또한 150네팔루피(약 2,000원)로 부담없는 수준이다. 산에 오르기 전, 식비가 매우 비싸다고 들었는데 그래도 3,000원 수준이다. 이런 고지에 인력으로 물자를 나른 것을 감안하면 차라리 저렴한 금액이다. 게다가 현지에서 직접 수확한 신선한 유기농 채소가 함께 나온다. 무거운 식량을 잔뜩 챙긴게 후회스러울 정도였다.


며칠간 걷자 푸르던 산은 어느새 설산으로 변해있었고 날씨도 상당히 추워졌다. 고도 3,700m 마차푸챠레 베이스 캠프(Machhapuchhre Base Camp; MBC)에서 ABC를 향한 마지막 밤을 보냈다. 설레는 마음 때문인지 자정 무렵에 잠이 깼다.


밖에 나와보니 그야말로 장관이 펼쳐져 있었다. 태어나서 처음 보는 셀 수 없이 많은 별. 달빛에 반사되어 하얗게 빛나는 눈 덮힌 산. 흰색과 검정색만 존재하는 한 폭의 수묵화였다. 급히 카메라를 가져와 여러차례 촬영을 시도해 봤지만 도무지 그 느낌을 표현할 수 없었다. 사진 대신 가슴에 새길 뿐이다.


눈밭을 가로질러 도착한 ABC의 모습 또한 말로 형용할 수 없었다. 새파란 하늘과 대비되는 새하얀 구름과 눈. 그 사이로 살며시 모습을 드러낸 안나푸르나Ⅰ봉(8,091m)은 가히 환상적이었다.


안나푸르나Ⅰ봉은 수줍어했지만 안나푸르나 남봉(Annapurna South·7,219m)과 힌출리(Hiun Chuli·6,434m)는 마치 듬직한 호위무사처럼 옆을 지키고 있었고, 트레킹 내내 북극성처럼 길을 안내한 마차푸챠레(Machhapuchhre·6,997m)는 어느새 등 뒤에서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ABC 롯지 뒤편으로 조금 더 올라가보니 추모비가 하나 세워져 있었다. “천상에서도 더 높은 곳을 향하고 있을 그대들이여. 박영석, 신동민, 강기석 이 곳에서 산이 되다” 바로 안나푸르나에 새 길. 코리안 루트를 개척하다 실종된 박영석 대장 등 3명의 추모비였다. 추모비 한켠에는 가족사진까지 놓여 있어 슬픔을 더해주었다.


ABC에서 감동은 잠시 뿐 갑자기 분노가 솟구쳤다. 손에 잡힐듯한 안나푸르나……. 하지만 나는 올라갈 수 없다. 저 추모비가 말해주고 있지 않은가. 여기까지 와서 그냥 내려갈 수 밖에 없다는게 너무 속상하다. 화풀이라도 하듯 셔터를 눌러보았지만 안나푸르나는 잡히지 않는다.


하산길은 한차례 우박과 비를 맞은 외에는 수월했다. 천연 온천이 있는 지누단다(Jhinudanda, 1,780m) 롯지에서 안나푸르나의 마지막 밤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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