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경제=권도윤 기자]여행(旅行)의 사전적 정의는 ‘일이나 유람을 목적으로 다른 고장이나 외국에 가는 일’이다.


하지만 실제 여행이란 '언어'라는 수단으로 온전히 표현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사전적 의미를 넘어서는 ‘무언가’가 분명 존재하기 때문이다.


실제 행동에 옮기기에 앞서 계획하고 준비하는 단계에서의 막연한 설레임, 그리고 매 순간마다 찾아오는 선택의 고통, 그럼에도 ‘항해’를 지속하게 하는 알 수 없는 힘.


그리고 모든 여정을 마친 후 원래 있던 것들의 소중함을 느끼게 만든다. 아련하면서도 가슴 한 구석이 뻐근해지는 기분. 이 모든 과정이 여행이고, 이를 경험하기 위해 우리는 또 다시 여행을 결심한다. <편집자주>



얼마나 잤을까? 웅성거림을 느끼고 눈을 떠보니 벌써 쿠알라룸푸르 공항이다. 멍한 상태로 수하물 창구에 가보니 자전거가 잘 도착해 있었다.


주위에 보이는 공항 여직원들은 머리에 히잡을 두르고 있다. 아 여기는 이슬람권이구나.


이제 뭘 해야하나? 아직 목적지도 갈 데도 없다. 인도만 생각했지 4일간 머물 말레이시아는 어떤 준비도 하지않았다.


뒤늦은 후회는 아무 소용없다. 우선 시내로 나가자.


쿠알라룸프르 관광지도를 받았으나 공항은 지도범위 밖이다. 차로 한시간가량 걸린다니까 약 60km? 곧 해가 질듯하고 길도 모르는데다 도로사정도 확인이 안된다.


40kg에 달하는 짐을 들고 지하철을 탈 수는 없으니 일단 공항버스를 타기로 했다. 말레이시아에 머물면서 몸도 풀고 해외생활에 적응할 참이다.


한참 후 도착한 쿠알라룸푸르 버스정류장에서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자전거를 조립했다. 비를 맞으며 자전거를 끌고 근처 값싼 숙소에 투숙했다.


시내에서 17km가량 떨어진 곳에 바투 동굴(Batu Caves)이라는 힌두 사원이 있다는 말을 들었다. 크게 부담스럽지 않은 거리로 이 나라 교통체계에 적응하기에도 알맞을 듯 했다.


그런데 말레이시아에도 힌두교가 있었나?


바투 동굴 역시 지도 밖에 있다. 출발 전 숙소에서 경로를 확인했다. 길은 단순하다. 북쪽으로 직진하다 ‘잘란 이포’(Jalan Ipoh)라는 곳에서 우회전해 ‘잘란 바투 케이브’(Jalan Batu Caves)를 따라 동쪽으로 가면 된다. 아무래도 ‘잘란’은 도로를 뜻하는가 보다.



스마트폰에 GPS기능이 있지만 로밍은 물론 배터리 용량도 작아 비상용일 뿐이다. 길을 잃어도 이 또한 연습이다.


한시간 반 가량 지나니 거대한 금빛 신상이 눈에 들어왔다. 주인공은 힌두교의 전쟁과 승리의 신 무루간이다.
신상이 너무 커서 무루간에 헌정된 사원이라기보다 마치 무루간이 사원을 지키는 것처럼 보인다. 담당 업무에 비해 몸 관리를 안한 듯 보이는 무루간 뒤에는 가파른 계단이 끝없이 이어져있다.


이 까마득한 계단은 총 272개로 인간이 지을 수 있는 모든 죄의 수를 의미한다고 한다. 그동안 지은 죄가 많은가 보다. 오르내리기 힘들었다.


동굴사원이라는 말을 듣고 좁고 긴 땅굴을 생각했으나 예상외의 구조다. 높은 계단 위에 엄청나게 넓은 종유석 천연동굴이 있었다. 동굴 끝에서 빛이 들어와 조명 없이도 환했고 종유석 틈 사이로 자라는 식물도 경이로웠다.



주변은 마치 조각공원처럼 장식되어 있다. 푸른피부 또는 코끼리 머리나 네 개 이상의 팔을 장착한 힌두신상을 보니 적잖이 당혹스럽다. 주위에서 들리는 염불인지 음악인지 모를 반복되는 가락이 낯선 기분을 더욱 증폭시킨다. 정말 새로운 문화권에 들어왔구나.



계단 주위에는 원숭이들이 놀고 있다. 원숭이도 신성한 동물인지 사원 반대쪽 절벽에는 원숭이 신(하누만)상이 서있었다.


한편 바투 동굴을 다녀오니 자전거여행이 쉽지 않겠다는 생각이 든다.


우선 말레이시아의 교통체계는 차량 좌측통행으로 한국과 반대다. 정신 똑바로 차리지 않으면 나도 모르게 역주행하고 있다.


또한 횡단보도가 극히 드물며(대부분 육교) 방향을 전환할때 유턴이 불가능하고 마치 고속도로 나들목과 같은 고가도로를 통과해야 한다.


갓길이나 도로 좌측 끝에 붙어 달리다보면 좌회전하는 샛길로 빠져버린다. 계속 직진하려면 미리 차선을 바꿔야 하므로 뒷 차량에 특히 주의해야 한다. 다행히 손을 들고 의사를 표시하면 대부분 운전자들이 양보해 주었다.


신호에 의한 정체가 없으므로 차량 흐름은 상당히 빠르다. 길을 잘 안다면 운전하기에 편리하지만 자전거로 다니기에는 쉽지 않았다. 도로 지도도 없이 표지판만 보고 방향을 판단하는게 어려웠고 분기점을 한번 놓치면 다음 분기점까지의 거리가 상당하다.


처음에는 이 도로체계에 적응을 못해서 자주 도로를 이탈했다. 게다가 한번 벗어나면 원위치로 돌아오는데 30분 이상 소요되었다.


한편 오토바이에 대한 배려는 잘 되어있다. 고가도로 아래는 대부분 이륜차 휴게소로 가꾸어져 있어 비를 피하기도 좋고 낮에는 그늘이 된다. 특히 우기에 막 접어든 시점이므로 매우 유용했다.



옷이 마를만 하면 다시 쏟아지는 비에 쫄닥 젖은 채 말레이시아의 첫 주행을 마치니 앞으로의 기대와 함께 긴장과 피로가 몰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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