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권업계, “취지는 좋지만 현실성 부족하다”

[스페셜경제 = 김봉주 기자] 금융권에도 300인 이상 사업장 주 52시간 근로제가 본격적으로 시행된 가운데 개선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들리고 있다. 현장에서는 이를 어떻게 체감하고 있을까. ‘저녁이 있는 삶’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취지 자체는 좋다는 평가다. 하지만 증권사들의 특정 몇몇 부서를 중심으로 볼멘소리가 나오고 있다. 근로기준법에 따르기 위해 증권사들은 근로시간이 단축된 근무제를 시행하고는 있지만, 업무량은 여전하다는 것이 근로자들을 떨떠름하게 만드는 주요 원인이다.

주 52시간 근무제는 근로시간을 줄임으로써 근로자 삶의 질을 향상시키겠다는 취지에서 도입됐다. 증권사들은 근로법을 지키기 위해 근로시간을 줄이기 위한 방법으로 오후 6시 이전에 자동으로 컴퓨터가 꺼지는 PC오프(Off)제도 등을 도입했다. 그러나 이러한 증권사의 방침은 회사에서 몰래 야근하거나 퇴근 후 카페나 집에서 개인용 컴퓨터로 업무를 계속하는 상황을 야기했다. 이는 주 52시간을 초과하는 ‘도둑 근무’이기 때문에 수당이 따로 지급되지도 않는다.

주 52시간 근무제로 인해 업무 유연성이 많이 떨어졌다는 지적도 나온다. 해외 증시 상황에 민감한 국내 주식 시장은 야간에 개장하는 선진국 주식시장 상황을 지속적으로 관찰해야 하는데, 근로기준법을 지키면서 이를 무리 없이 받아들일 증권사는 많지 않다. 지난해 7월 ‘저녁이 있는 삶’을 찾을 것이라는 기대감에 시작한 주 52시간 근로제에 대해 증권가에서는 ‘현실성이 부족한 정책’이라고 말이 돌고 있다.


<스페셜경제>는 증권업계 곳곳에 주 52시간 근로제가 어떻게 적용되고 있는지 조명해 봤다. 

증권가에 ‘저녁 있는 삶’은 없다
‘공짜 야근’이 당연한 증권업계

 

9개월 계도기 종료후 시작된 증권업계 주 52시간 근무제 


금융증권업은 당초 지난해 7월부터 300명 이상 사업자에 대한 주 52시간 근무제를 정식으로 도입해야 했으나 특례업종으로 인정받아 1년의 유예기간을 받았고, 9개월간의 계도 기간은 지난달 말로 종료됐다. 이에 따라 이달 1일부터 이 근무제를 위반한 사업주는 처벌받게 됐다. 위반했다고 해서 바로 처벌이 이뤄지는 것은 아니다. 먼저 시정 명령이 내려지고 시정 기간 이후에도 개선되지 않으면 처벌받게 되며, 시정 기간은 3개월이지만 추가 연장 1개월이 가능해 최대 4개월가량 주어진다.

증권업계에서는 주 52시간 근무제 시행을 앞두고 일찍부터 이를 준비해 왔다. 국내와의 시차가 다른 해외영업·투자은행(IB) 부서에는 자율출퇴근제를 도입하고, 일반 직렬에는 PC오프제도를 도입하는 등 업무 환경을 변화시켰다. 선택적 근로시간제, 탄력적 근로시간제, 재량 근로시간제 등의 유연근로제를 도입하기도 했다.

주 52시간 근무에 대한 대비는 대형사를 중심으로 전개됐다. 삼성증권과 키움증권은 PC오프제를 도입했고, 미래에셋대우는 PC오프제 대신 근로시간 단축을 위한 전담반을 조직하고 직무별로 일찍 출근하면 그만큼 먼저 퇴근하는 유연근무제에 돌입했다. NH투자증권은 정규근무 시간을 오전 8시~오후 5시로 지정하면서 유연근무제를 함께 도입했다. KB증권과 한국투자증권은 PC오프제와 유연근무제를 시행하고 있다. 신한금융투자는 근로시간을 정하고 그 범위 내에서 근무시간을 자유롭게 정하는 선택 근무제와 PC오프제를 함께 운영하고 있다.


실제 52시간 근무재는 지켜지지 않고…업계 “이미 예상한 결과”

하지만 실제로 최대 52시간 근무가 지켜지지 않는다는 보고가 잇따르고 있다. 증권업계, 특히 해외영업이나 투자은행 등의 분야에서는 ‘밤낮이 없다’라고 말할 정도로 야근이 잦고 업무시간이 주 100시간 이상을 넘기기가 일쑤였다. 주 52시 근무제가 시행되며 PC오프제로 사내 컴퓨터가 꺼지면 증권가 직원들은 집에 가서 개인용 컴퓨터로 일하기도 한다. 특히 실적에 따라 보상과 승진이 결정되는 투자은행 부문은 야간 고객 미팅과 밤샘 자료 준비 등으로 주 52시간을 넘기는 경우가 다반사여서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일해 왔고, 근무제 시행 뒤에도 큰 변화가 없는 모습이다. 투자은행 부서 직원들은 “업무 특성상 야간 고객 미팅이 많은데 그러다 보면 주 52시 근무는 불가능에 가깝다. 업계에서는 (주 52시 도입에 대해) 특별히 언급도 없고 신경도 쓰지 않는 분위기다”라고 입을 모아 말했다. 증권가 내에서는 주 52시간 근무제가 현실화되기 어렵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증권사 규모별로 근무제 시행에 대한 온도차가 감지되기도 했다. 자산 총계 1~2위에 랭크돼 있는 미래에셋대우와 NH투자증권 등의 경우 정규 직원만 2000명이 넘지만, 중소형 증권사의 인력 규모는 그의 절반도 안 되는 실정이다. 중소형 증권사들은 인력 풀이 크지 않아 세분화된 근무 시간을 소화함에 있어서 매우 경직된 모습이다. 특히 업무량이 많은 리서치부문(애널리스트)이나 회사 전산시스템을 상시 점검해야 하는 IT관련 부서, 야간에 개장하는 해외 증시 상황을 지속적으로 관찰해야 하는 국내 주식 관련 부서 등에서 업무를 맡고 있는 근로자들이 어려움을 토로하고 있다.

아울러 상사 성향에 따라 엇갈리는 근무 현황도 지적됐다. 대부분의 증권사들은 오전 7시~오후 4시, 오전 8시~오후 5시, 오전 9시~오후 6시 등 근무 시간도 세분화해 근무제에 대비했다. 하지만 회사 부서원들에 대한 실질적인 권력은 부서장들이 쥐고 있어 상사 성향에 따라 이 제도가 잘 지켜지는 곳도 있는 반면 유명무실한 부서도 있다. 예를 들어, 오전 7시에 출근하는 직원은 4시에 정규 근무시간이 끝나도 상사가 자리를 지키면 눈치 보느라 제때 퇴근하는 것이 어려울 수 있기 때문이다. 증권업계에서 “주 52시 근로제 시행으로 ‘복불복식 근무’를 하고 있다”는 말까지 나오고 있다. 새로운 근무제와 관련한 임직원 교육이 필수적으로 수반되지 않아 이런 문제점이 생겼다는 의견도 나오고 있다.

‘탄력근로제 확대 방안’도 어렵다…희미한 증권가 워라밸’


이런 상황에서 그나마 주 52시간 근무제를 보완할 방법으로 꼽히는 ‘탄력근로제 확대 방안’도 국회의 문턱을 넘지 못했다. 앞서 국회에서는 금융권과 같이 특수 수요가 있어 1주 최대 근로시간을 52시간 이내로 제한하는 것이 불가능한 기업들에게 일정한 단위 기간을 주고 이 안에서 근로시간을 탄력적으로 운영하도록 하는 ‘탄력근로제’에 대한 확대 논의를 진행한 바 있다. 국회 환경노동위원회에 계류된 근로기준법 개정안에는 탄력근로제 단위 기간을 현행 3개월에서 6개월로 늘리는 내용이 담긴 반면, 야당과 경영계는 단위 기간을 최대 1년으로 하자고 주장했다. 결국 지난 5일 폐회한 3월 임시국회는 탄력근로제 단위기간 확대를 담은 근로기준법 개정안을 처리하지 못한 채로 끝났다.

 

(사진제공=뉴시스, 게티이미지뱅크)

스페셜경제 / 김봉주 기자 seraxe@speconom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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