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성실의 원칙’ 적용 여부가 주된 쟁점
대법, 신의칙 엄격히 판단‥노조 손 들어줘
“경영 불확실성 늘어나” 경제계 우려

 

[스페셜 경제=변윤재 기자] 20일 기아자동차가 노동조합(노조)와의 통상임금 소송에서 패소했다. 이로써 9년 간 끌어온 소송은 일단락 됐다. 2심 판결 이후 소송에 참여한 근로자 대부분이 사측과 합의했던 만큼, 기아차가 추가로 뷰덤해야 할 비용은 500억원 정도로 추산된다.

 

다만 액수를 떠나 경제계에서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로 비상경영 상황인데도 신의칙이 적용되지 않은 점에 강한 유감을 표하고 있다. 인건비 부담이 큰 제조업은 경영 위기가 가중될 수 있다는 지적이다향후 업계에 미칠 파장에 대한 우려도 크다. 현대중공업과 현대미포조선, 한진중공업, 아시아나항공, 만도, 금호타이어, 두산모트롤 등이 통상임금과 관련해 소송을 벌이고 있다.

 

이날 대법원 1(주심 김선수 대법원)는 이날 기아차 근로자 3531명이 기아차를 상대로 낸 1조원대 임금 소송 상고심에서 원고 일부 승소로 판결한 원심을 확정했다. 앞서 기아차 생산직 근로자들은 2011년 연 700%에 이르는 정기상여금과 각종 수당을 통상임금에 포함해 수당과 퇴직금을 정해야 한다며 소송을 냈다.

 

이번 임금 소송의 핵심은 통상임금 신의성실의 원칙(신의칙)이 적용될 수 있는지 여부였다. 정기적으로 지금되는 상여금이 통상임금에 해당하더라도 기업 경영상황이 어려워지면 추가 법정수당을 지급하지 않아도 된다는 신의칙을 인정할지에 따라 소송의 결과가 달라질 터였다.

 

201312월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통상임금에 정기상여금 등 정기적 성격의 임금을 포함해야 하지만, 임금 추가 지급으로 회사가 '경영상 어려움'에 처할 경우 통상임금 요구를 제한할 수 있다는 신의칙에 대해 개략적 개념을 제시했었다.

 

기아차는 경영난을 겪고 있는 상황이기 때문에 막대한 배상은 기업의 존립을 위태롭게 할 수 있다며 통상임금을 소급 지급할 수 없다고 주장했지만, 1·2심 재판부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기아차가 2008년부터 매년 연평균 17000억원에 달하는 당기순이익을 남긴 점을 들어 추가 임금 지급으로 채무가 늘더라도 매출액의 3.3%에 불과한 터라 충분히 지급 여력이 있다는 이유에서다. 다만 정기상여금은 통상임금에 포함한 대신, 2심에서는 중식비와 가족 수당을 통상임금에서 제외시켰다.

 

당초 소송에는 근로자 27451명이 참여해 2심 판결 후 기아차가 지급해야 할 추가 임금은 이자를 포함해 4223억원이었다. 이후 근로자 대부분은 상여금을 평균 월 31000원씩 올리고 평균 1900여만원의 추가 급여를 지급받기로 합의하고 소를 취하했다. 상고심에는 참여한 근로자는 1심 참여인원의 약 11%, 이 비율대로 계산해보면 기아차가 추가로 지급할 임금은 500억원 안팎으로 추정된다.

 

경제계는 일제히 우려의 목소리를 냈다. 코로나19 위기를 고려하지 않은 판결이라는 지적이다. 특히 인건비 비중이 높은 자동차산업의 경우, 생존이 최우선이 상황인데 신의칙의 기준이 모호해지면서 기업 경영활동이 위축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한국경영자총협회(경총)신의성실의 원칙에 따른 예외 적용을 인정하지 않아 기존 임금체계를 성실하게 준수한 기업이 막대한 규모의 추가적 시간외수당을 부담하게 했다코로나19로 위기에 처한 상황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판결이라고 유감을 표했다.

 

경총은 법원은 통상임금의 신의칙 적용기준을 주로 단기적인 재무제표를 근거로 판단하고 있으나, 이는 치열한 국제경쟁에서 전략적으로 경영을 추진해야 하는 기업의 경영상황을 전혀 고려하지 못한 측면이 크다우리나라 자동차 기업들은 매출액 대비 인건비 비중이 12% 이상으로 R&D나 마케팅에 대한 경쟁력이 지속적으로 악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이번 판결로 인건비 부담이 가중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그러면서 기아차 노사는 지난해 합의를 했지만 노사가 자율적으로 풀어갈 길마저 가로막고 있다면서 많은 통상임금 소송이 진행되고 있는 상황에서 대법원은 현실과 국제 경쟁 환경 등을 고려해 재심의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추광호 한국경제연구원 경제정책실장은 코로나19 확산에 따른 국가경제 위기, 자동차산업 구조 변화 등으로 산업경쟁력이 악화된 상황이라며 이번 판결로 예측치 못한 인건비 부담이 급증하여 기업경영의 불확실성이 높아질 것이라고 우려했다.

 

특히 추 실장은 신의칙을 적용할 수 있는 기업경영 어려움에 대한 구체적인 판단기준이 제시되지 않아 산업계의 혼란은 지속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통상임금 소송에 따른 기업경영 위축으로 노사 모두가 피해자가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조속히 신의칙 적용 관련 구체적인 지침을 마련하여 소모적인 논쟁을 줄여야한다고 제안했다.

 

스페셜경제 / 변윤재 기자 purple5765@speconomy.com

저작권자 © 스페셜경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