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이 20일 청와대 본관에서 열린 아카데미 영화상 4관왕에 빛나는 기생충봉준호 감독을 비롯한 제작진 및 출연진 격려 오찬을 하기 전 환담을 나누고 있다.

 

[스페셜경제=장순휘 정치학박사] ‘봉하이브’로 통하는 영화감독 봉준호(奉俊昊)의 신드롬이 전세계 영화계를 강타하는 쾌거가 있었다. 제92회 아카데미상에서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 최우수 국제영화상, 최우수 작품상, 최우수 감독상, 최우수 각본상의 4개 부문의 상을 수상한 최초의 아시아 영화감독이 됐다. 또한 개인이 아카데미 4개 부문상을 모두 받은 것은 1953년 월터디즈니 이후 67년 만이다.

봉 감독의 영화는 시대를 패러디하는 시사성 있는 사회적 문제점의 고발과 다양한 소재를 의외성으로 재구성한 블랙코미디 작품성으로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독특한 작품세계를 가지고 있다. 2019년에 발표된 ‘기생충’은 블랙코미디 서스펜스 영화로서 4인 가족이 전원 무직(無職)을 소재로 아버지 기택(송강호)의 아들 기우(최우식)와 기정(박소담)가 박동익 사장(이선균) 자녀들의 과외를 시작하면서 벌어지는 줄거리다.

주제는 한국사회에 깊이 자리잡은 빈부(貧富)격차로 상징되는 양극화문제를 다루고 있다. ‘기생충’은 결코 단순한 ‘부자’와 ‘빈자’의 대립구도로만 작품을 봐서는 안되는 것이 영화작품에 함의된 복잡한 ‘정치사회적 메타포(은유)’를 풀어헤쳐봐야 할 숙제를 가지고 있다. 그래야 제대로 보인다. 즉 영화 ‘기생충’이 “가난한 일가족의 개연성을 개입시킨 부자 코스프레의 희비극이었을까?”하는 끊임없는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가난한 반자본주의가 부유한 자본주의를 적으로 공격하는 대립적 갈등과 충돌에서 공존(共存)이 불가하다는 한국사회의 불투명한 미래를 암시한 작품성을 볼 수 있다.

지난 19일 봉 감독은 귀국 기자회견에서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를 솔직하게 그리려고 했던게 ‘대중적인 측면에서 위험’ 할 수는 있어도 영화가 택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고 생각했다”라고 말했다. 그래서 그가 말한 ‘대중적인 측면에서의 위험’을 왜 택했어야 했는가를 문학평론적 관점에서 분석해보고자 한다. 봉 감독이 선택한 그 ‘위험’은 고스란히 작품을 감상한 대중들에게 강요됐고, 사회적으로 ‘대중적인 위험’이 됐다는 것이다.

첫째, 배우의 배역구조를 통해본 ‘자본주의’와 ‘반(反)자본주의’의 대립구조적 위험이다. 먼저 박사장 가족은 자본주의의 전형이다. 박사장은 가장으로서 부(富)와 권력을 상징하고, 부인은 돈(Money)으로 삶을 관리하는 배금주의를 의미한다. 부인의 언행에서는 물질적 풍요와 사치의 극단을 볼 수 있고, 자녀들의 공부도 고액과외의 도움을 받는다. 아들 다송이는 천방지축으로 마치 자본주의의 불안정한 미래모습을 연출하고, 딸 다혜는 자본주의의 잠재된 불만을 표출해 자본주의 가족구성의 불협화음을 보여준다. 반면에 무능하고 가난한 기택(송광호)의 가족은 반지하 전세방에서 현실과 이상의 모순된 경계선에서 가난의 고통을 적응하고 있다.

그리고 아들 기우의 가짜 대학생으로 사기위장과 딸 기정의 공문서 위조행위 그리고 현대의 아줌마를 상징하는 엄마의 무모함은 수단방법을 가릴 것이 없다는 반자본주의의 민낯을 상징한다. 박 사장 집 가정부는 반자본주의에서 친(親)자본주의에 기생해 생계를 유지하는 위선자를 상징한다. 결국은 기택의 가족으로부터 살해당하는 비운을 겪으며 ‘가난한 자’의 적(敵)이 ‘가난한 자’라는 모순을 보여준다. 이러한 아이러니가 현실에서도 일상화 돼있는 것이 실상이기 때문에 좌파는 공격대상을 우파로 몰아가면서도 내부적으로 끊임없는 이데올로기적 내부투쟁으로 긴장하는 것이다. 이런 긴장감이 사회적으로 지속적인 갈등과 불안을 조성하는 대립구조적 위험으로 나타난다.

둘째, 그람시의 진지전 이론으로 분석한 프롤레타리아의 브루조아지에 대한 계급투쟁적 위험이다. 그람시는 자본주의 국가에서는 폭력적 계급투쟁과 같은 ‘기동전(機動戰)’은 적합하지 않다고 주장하고 있으며, 오히려 점진적이고 전면적인 ‘진지전(陣地戰)’이 적합하다고 강조했다. 즉 광범위한 자본주의 사회의 조직에 은밀하게 침투해 진지를 만들고, 그 진지를 중심으로 견고한 참호(塹壕)를 구축해 강력한 세력을 확장하라는 것이다.

기생충에서 아들 기우는 과외선생의 기회를 잡고 가짜 대학생으로 위장해 박사장의 가정에 침투한다. 과외선생이라는 진지를 중심으로 딸 기정의 미술심리치료선생이라는 진지를 점령한다. 기우라는 반자본주의 전위대의 진지를 중심으로 딸 기정과 엄마 그리고 기택까지 4인 가족이 박 사장의 자본주의에 침투해 참호를 확산하는데 성공한 것이다. 그런데 박 사장 가족의 여행을 틈타서 기택가족이 보여주는 브루조아지의 코스프레도 프롤레타리아의 계급투쟁을 내세우지만 자본주의의 풍요와 쾌락을 즐기려는 반자본주의의 모순으로 재발견하게 된다.

특히 빗속 탈출과정에서 지하의 빈곤층인 가정부를 타살하는 장면은 프롤레타리아의 혁명을 위해 동정, 자비, 배려도 없는 무자비한 가치관에 놀라게 된다. 따라서 그람시의 진지전 이론에서 프롤레타리아의 진지는 구축중이며, 브루조아지가 방심한다면 기습침투당할 수 있다는 결과론적인 계급투쟁의 위험을 보여준다.

셋째, 자본주의의 불변적 자기모순과 반자본주의의 무차별 공격성은 상호공존 불가적 위험이다. ‘기생(寄生)’의 사전적 의미는 “스스로 생활하지 않고 남에게 의지해 생활함”으로 정의돼있다. 그러나 영화에서는 자본주의의 부(富)를 부도덕시하는 관점이므로 반자본주의의 탈취와 파괴의 대상으로 농락한 것은 작품의 이데올로기적 메타포로 볼 수 있다.

빈자(貧者)인 기택가족은 전체주의적 범죄단으로 진지편성을 해 부자(富者)인 박 사장의 자본주의적 풍요에 기생해 분배를 즐기면서도 이데올로기적으로 공생(共生)은 거부하는 것이다. 그러한 자본주의적 ‘질서’를 거부하고 타도하려는 반자본주의적 ‘무질서’와의 충돌에서 자본주의의 잔치는 비극의 현장이 된다. 반자본주의가 반자본주의를 공격하는 기택가족과 문광가족의 갈등조차도 자본주의 범주내에서 조성된 박탈감과 소외감 그리고 배금주의적 비윤리성이 원인으로 귀결된다. 결국 박사장을 공격한 기택의 비이성적 살인은 프롤레타리아의 계급투쟁으로 빈자들의 저항적 복수를 그린 것일까?

영화 기생충의 함의는 상호주의적 ‘공존(共存)’이라는 시대적 과제를 제시하면서도 자본주의와 반자본주의의 공유점(共有點)이 없다는 왜곡을 보여준다. 기생충은 부자와 빈자의 양립불가를 모순으로 충돌시킨 봉감독의 좌파패러독스가 그려낸 우리사회의 ‘위험한 이야기’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는 공산사회주의와 전체주의를 극복하고 인류사회를 궁극적으로 발전시켜온 제도인 점에서 결코 대체될 수 없는 절대적 가치가 있다. 따라서 비록 자본주의 사회가 빈부격차와 배금주의적 모순이 상존해도 상호 공존해야할 질서를 반자본주의적 공격성으로 파괴하려든다면 상호공존이 불가한 위험이라는 경고가 담겨져 있다.

결론적으로 영화 기생충은 작가의 의도대로 전 세계 ‘대중들을 위험’에 빠뜨린 것이 성공의 결정적인 요인이었다. 그 ‘위험’은 바로 모든 악의 근원이 ‘돈’ 때문이라는 독선을 강요당하는 것이다. 대중들이 봉 감독의 ‘대중적 측면에서의 위험’을 학습한다면 공존불가의 대립과 투쟁에서 숨 막히는 일상을 보내야하지 않을까? 자본주의 질서에서의 프롤레타리아의 가난은 극복의 기회를 통해 브루조아지로 변신이 가능한 상호공존의 경계지대가 형성돼 있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따라서 영화 기생충에서 봉 감독의 ‘솔직한 시대의 진단’은 극단적인 측면이 없지 않다. 영화 기생충은 양극화의 모순과 갈등의 구조적 대립을 넘어선 상호공존 가능성을 결론으로 보여주었어야 했다. 영화의 마지막에 아들 기우는 “돈을 벌면 이 집부터 살게요. 아버지는 그냥 계단만 올라오시면 됩니다”라는 독백으로 공존불가의 대립을 형이하학적으로 평가절하하고 있어서 결국은 위험했다.

<사진제공=뉴시스>

 


 

스페셜경제 / 장순휘 정치학박사 speconomy@speconomy.com 

저작권자 © 스페셜경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