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사랑 지극했던 아버지와의 작별에 이부진 호텔신라 사장 소리없이 오열
이명희 신세계그룹 회장·이재현 CJ그룹 회장 등 범삼성가 영결식 참석
고교동창 김필규 전 회장 “이건희 만한 ‘승어부’ 못봤다” 회고
이수빈 고문 약력보고 중 “영먼에 드셨다”는 부분에서 말 잇지 못해
한남동 자택·화성 반도체 사업장 들린 뒤 수원 선산에 영면

▲ 28일 새벽, 서울 삼성서울병원 장례식장으로 취재진들이 하나 둘 모여들고 있다. (사진=최문정 기자)

 

[스페셜경제=최문정 기자]아직 채 날이 밝지 않은 28일 오전 6시경, 서울 삼성서울병원 장례식장은 평소보다 이른 아침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날은 지난 25일 별세한 故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의 영결식이 열리는 날이다.

장례식장 앞은 분주하게 움직였다. 이건희 회장의 마지막 출근길이었기 때문이다. 삼성 측 직원들은 질서유지와 원활한 장례절차 진행을 위해 이리저리 뛰어다녔고, 몰려든 취재진은 순식간에 250여명으로 불어났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로 인해 외부 출입이 통제되고 간소하고 조용하게 치르고 싶다는 유족의 뜻에 따라 가족장으로 치러졌음에도 이 회장을 추모하는 일반 시민들의 방문도 이어졌다. 장례가 치러지는 나흘 간 꽤 여러 명의 시민들도 이 회장의 빈소를 찾았다. 전날 한 할머니는 “이 회장님의 영전에 바쳐 달라”며 취재진에게 국화꽃을 건네기도 했다.

고인의 장례식이 가족장으로 조용히 치러지길 바란 유족들의 뜻에 따라, 이날 진행된 영결식과 발인식도 비공개로 진행됐다. 삼성전자는 “남은 장례 일정도 유족들이 차분하고 엄숙하게 고인을 보내드릴 수 있도록 많은 도움 부탁드린다”는 뜻을 전했다.

오전 7시를 약간 넘긴 시각, 유족들과 생전 고인과 동고동락했던 삼성의 전‧현직 임원 등을 태울 미니버스 2대가 장례식장으로 들어섰다. 30분 뒤인 7시 30분경에는 이 회장의 관을 실을 영구차도 들어왔다.

그 무렵, 장례식장 지하에선 이 회장의 영결식과 발인이 진행됐다. 영결식은 여타의 첩보작전을 방불케 하는 철저한 경비 속에 진행됐다. 삼성 총수 일가를 비롯한 영결식 참석자들은 취재진들과 방문객들이 몰린 장례식장 입구 대신, 옆 건물인 암병동 지하 통로를 통해 장례식장 지하로 이동했다.

 

▲ 영결식에 참석하기 위해 삼성 총수 일가가 미니버스에서 내리고 있다. 이재용 부회장이 어머니 홍라희 전 관장과 여동생 이부진 사장을 부축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뉴시스)


영결식에 참석하기 위해 미니버스에서 내린 이재용 부회장은 어머니 홍라희 여사와 여동생 이부진 사장을 부축했다. 이어 이서현 이사장이 버스에서 내렸다. 모두가 침통한 표정을 짓고 있는 가운데 이부진 사장이 소리 없이 오열했다. 생전 이 회장은 첫딸인 이부진 사장을 각별히 아낀 것으로 알려졌다.

영결식에는 유족인 홍라희 전 리움미술관장,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이부진 호텔신라 사장, 이서현 삼성복지재단 이사장, 사위 김재열 삼성경제연구소 사장 등이 참석했다. 또한 고인의 동생인 이명희 신세계 회장과 조카인 정용진 부회장, 이재현 CJ 그룹 회장 등도 자리했다. 이 부회장과 사적으로 친밀한 사이로 알려진 정의선 현대자동차그룹 회장을 비롯한 재계 인사들도 있었다.
 

비공개로 진행된 영결식은 이수빈 삼성 상근고문(전 삼성생명 회장)의 약력보고, 김필규 전 KPK 회장의 추도사, 추모 영상 상영, 참석자 헌화의 순서로 진행됐다.

 

이수빈 삼성 상근고문은 1974년 한국반도체를 인수하며 반도체산업의 초석을 다지고 신경영을 통해 삼성을 세계적 기업으로 성장시킨 고인의 삶을 회고하다 영면에 드셨다는 부분에서 목이 멘 듯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이어 김필규 전 KPK 회장이 고교 동창이었던 이 회장과의 추억을 회상했다. 그는 어린 시절 새로운 기술에 대한 호기심, 일본 유학 당시 라디오·TV 등을 재조립하며 시간을 보냈던 모습을 떠올렸다.

 

그러면서 “‘승어부라는 말이 있다. 아버지를 능가한다는 말로, 이것이야말로 효도의 첫걸음이라는 것인데 세계 곳곳을 돌아다녔지만 이건희 회장보다 승어부한 인물을 본 적이 없다부친의 어깨 너머로 배운 이건희 회장이 부친을 능가하는 업적을 이뤘듯 이건희 회장의 어깨 너머로 배운 이재용 부회장이 새로운 역사를 쓰며 삼성을 더욱 탄탄하게 키워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고인의 가족과 지인들은 198712월 삼성 회장 취임 이후 2014년 쓰러지기 전까지 경영 일선에서 활약했던 이 회장의 모습을 담긴 추모영상을 보며 고인과의 추억을 마음에 새겼다.

 

약 1시간 뒤, 삼성 총수 일가가 영결식을 마치고 모습을 드러냈다. 이재용 부회장은 마스크로 얼굴은 가렸지만 잔뜩 굳어 침통한 표정은 가릴 수 없었다. 눈물을 흘리며 영결식에 입장한 이부진 사장은 침통한 마음을 숨길 수 없는지 손수건으로 입을 틀어막고 바쁜 걸음을 옮겼다.

 

▲ 최지성 전 삼성 미전실장, 이학수 전 부회장, 이인용 사장 등 삼성그룹 사장단이 굳은 얼굴로 장지행 버스를 기다리고 있다. (사진=최문정 기자)


총수 일가가 막 미니버스에 오를 무렵, 장례식장 입구에는 삼성그룹의 전‧현직 사장단들이 나란히 나타났다. 이 회장을 누구보다 가까이서 보좌했고, 함께 오늘날의 세계 굴지의 기업 삼성을 키워낸 사장단의 눈엔 아쉬움이 가득했다. 최지성 전 삼성 미래전략실장과 이학수 전 삼성그룹 부회장, 삼성전자 권오현 상임고문, 삼성전자 김기남 부회장, 정현호 사업지원TF 사장, 이인용 사장 등은 별 다른 말도 없이 조용히 장지행 버스에 올라탔다.

 

▲ 故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의 운구차량이 주차장을 빠져나오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뉴시스)

오전 9시쯤 이 회장의 운구 차량이 지하주차장 밖으로 미끄러져 나왔다. 그 뒤를 유족들과 삼성 측 인사들이 나눠 탄 미니버스 몇 대만 뒤따랐다. 짧은 행렬은 막힘없이 삼성서울병원을 빠져나갔다.

이 회장은 생전 자신이 가장 애정과 열정을 쏟았던 장소들을 마지막으로 두루 들렀다. 운구 행렬은 우선 용산구 한남동으로 향했다. 운구 차량은 생전 소문난 수집가이자 미술 애호가였던 고인을 기려 리움미술관을 들렀다. 이후 한남동 이 회장 자택을 돌아본 뒤, 고인이 삼성그룹의 회장으로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 집무실인 이태원동 승지원을 돌았다.

 

▲ 삼성전자 화성사업장을 빠져나오는 이건희 회장의 영구차. 화성사업장 직원들이 준비한  추모 현수막이 내걸려 있다. (사진=뉴시스)


‘회장’ 이건희의 마지막 출근지는 삼성전자 기흥‧화성 반도체 사업장이었다. 이곳은 고인이 지난 1980년대 사재까지 출연해가며 가꾼 삼성전자 메모리 반도체의 생산기지다. 생전 이 회장은 지난 1984년 기흥 삼성반도체통신 VLSI공장 준공식부터 2011년 화성 반도체 16라인의 기공식과 이후 준공까지 총 8번의 행사를 챙겼다. 변방의 기업에서 세계 1위 메모리 반도체 기업으로 자란 삼성전자의 역사가 그대로 녹아 있다.

이 회장의 마지막 방문에 근무하던 임직원 1000여명도 배웅을 나왔다. 이들은 손에 국화꽃을 들고, 대형 스크린에 이 회장의 생전 방문 영상을 틀어 놓고 이 회장의 마지막을 지켜봤다. “반도체 100년을 향한 힘찬 도약을 회장님과 함께 할 수 있어서 영광이었다”며 “반도체 신화 창조를 계속 이어가겠다”는 글귀가 적힌 현수막도 내걸렸다.

화성사업장에서 잠시 멈췄던 운구 행렬은 곧장 수원 가족 선산으로 향했다. 명실상부한 ‘대한민국 경제대통령’ 이건희 회장은 28년의 길고 긴 임기를 마치고 영면에 들었다.
 

스페셜경제 / 최문정 기자 muun09@speconom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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