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삼성전자 사옥 전경 (사진=뉴시스)

[스페셜경제=변윤재 기자] “2014년에 회장님이 쓰러지시고 난 후 부족하지만 회사를 위해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지만, 큰 성과를 거두었다고 자부하기는 어렵습니다. 다만 그 과정에서 깨닫고 배운 것도 적지 않고 미래 비전과 도전 의지도 갖게 되었습니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지난 5월 대국민사과를 통해 이 같이 밝혔다. 삼성의 후계자로 경영수업을 받은 지 십수년이 지났고, 아버지 이건희 회장을 대신해 삼성을 6년 가까이 안정적으로 이끈 장본인이지만 그는 스스로 더 노력하겠다고 했다. 할아버지의 사업보국, 아버지의 신경영에 이어 아직까지는 자신만의 색을 뚜렷하지 못한 까닭이다.

 

이 부회장의 65개월은 이재용의 삼성을 만드는 밑그림을 그리는 시간들이었다. 특히 2018년 경영에 복귀한 이후 그는 성장 동력을 육성하는 데 집중하며 자신의 구상을 구체화시키기 시작했다. 앞으로 이 부회장은 사업보국에 대한 철학은 이어가되, 초격차를 위한 선제적 투자로 뉴삼성의 정체성을 만들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재용 체제는 시작부터 험로에 놓였다. 정부여당은 공정경제 3(상법·공정거래법 개정안·금융그룹감독법 제정안)고 보험업법 개정안을 추진하고 있기 때문에 지배구조를 다시 짜고 지배력을 유지할 방안을 찾아야 한다. 10조원 이상으로 추정되는 상속세 재원을 마련하는 것도 시급하다. 그러나 가장 큰 걸림돌은 사법리스크다.

 

위기는 곁에 있다대내외 불확실성 파고 넘실

 

이 부회장은 삼성이 직면한 현 상황을 위기라고 판단하고 있다. 최근에 직접적인 언급은 자제하고 있지만 몇 달 전까지만 해도 그는 가혹한 위기 상황” “경영환경이 우리의 한계를 시험하고 있다” “불확실성의 끝을 알 수 없다며 불안감을 드러냈다.

 

통상 그룹의 오너는 큰 그림을 그린다. 그룹의 비전을 제시하고 대규모 투자 등을 통해 성장 동력을 발굴·육성하며 핵심 인재를 영입하거나 인력 조정을 하는 역할을 한다. 그런데 이 부회장의 요즘 행보는 디테일에 초점에 맞춰져 있다.

 

이 부회장은 상반기에만 20번이 넘는 현장 경영을 이어갔고, 최근 2주 사이에는 네덜란드와 스위스에 이어 베트남 출장을 다녀왔다. 유럽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세로 제한적 봉쇄 조치가 취해진 상황이고, 베트남은 강력한 방역으로 확진자 수가 한 자리에 머물고 있지만 지역별로 산발적 발생은 여전하다. 감염의 우려에다 별도의 격리는 없지만 입국 전후로 검사를 받아야 하는 번거로움을 감수해야 한다. 그럼에도 국내외 현장을 직접 챙겨야 할 만큼 상황이 녹록치 않다는 반증이다.

 

일단 이 부회장 본인이 사법리스크에 매여 있다. 22일에는 경영권 불법 승계 의혹 재판이, 26일에는 국정농단 파기환송심이 재개되며 이 부회장은 동시에 2개의 재판을 준비해야 할 처지에 놓였다.

 

국정농단 재판과 관련해 이 부회장은 20171심에서 징역 5년의 실형을 받고 법정 구속됐다가 20182심에서 89억원에서 36억원으로 줄어들면서 형량이 줄어들었다. 이에 징역 26개월에 집행유예 4년을 받은 이 부회장은 직후 경영에 복귀했다

 

그러나 지난해 대법원 전원합의체가 원심을 깨고 서울고법으로 파기환송했다. 삼성이 박근혜 전 대통령과 비선 실세 최순실씨 딸에게 제공한 동계스포츠영재센터 지원금 16억원과 마필 구매비 34억원 등을 뇌물로 판단한 것이다. 이에 따라 뇌물 공여 혐의액은 기존 36억원에서 86억원으로 다시 늘어났다.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상 횡령액이 50억원 이상이면 무기 또는 5년 이상 징역형을 선고해야 한다. 뇌물 혐의가 인정되고 양형 심리를 받지 못한다면 이 부회장은 실형을 선고받을 가능성도 배제할 순 없는 셈이다.

 

다만 재판부는 삼성 준법감시위원회 실효성을 판단해 양형 심리를 하갰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를 위해 박 전 대통령 탄핵심판 주심 강일원 전 헌법재판관을 전문심리위원으로 지정하고, 12월 중순경에는 최종 변론을 진행할 예정이다.

 

국정농단 재판이 내년 초 마무리된다 해도 경영권 불법 승계 의혹 재판은 이제 막 시작된 참이라 사법리스크에 따른 부담이 계속될 전망이다.

 

검찰은 이 부회장과 전·현직 삼성 임원 등 11명을 자본시장법상 부정거래·시세조종행위, 업무상 배임, 외부감사법 위반 등 혐의로 불구속 기소했다. 2015년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 삼성바이오로직스 회계 변경이 이 부회장의 경영권 승계를 위한 지배구조 개편의 일환으로 이뤄졌다는 게 검찰의 의심이다. 이를 위해 시세를 조종하고 기업의 가치를 부풀리거나 낮춰 기업과 주주의 이익을 침해했다고 보고 있다. 이에 대해 삼성은 합법적 절차에 따라 이뤄진 행위였으며, 불안한 경영권을 안정화시키고 사업상 시너지 효과를 위한 선택이었다고 반박하고 있다.

 

문제는 두 재판은 경영권 승계라는 연결고리로 이어져 있다는 점이다. 이 부회장으로의 승계를 위해 정권의 실세에 청탁했고, 최소의 비용으로 그룹 지배력을 강화하기 위해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조직적 불법행위가 벌어졌다는 게 수사진의 논리다. 절차적 합법성을 강조한다 해도 국정농단 파기환송심의 결과가 다른 재판에 영향을 줄 수 있다.

 

결국 중·장기 목표를 점검하고 뉴삼성의 전략을 구체화해야 할 때 사법리스크로 그룹이 발목잡힐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국정농단 재판 당시 이 부회장은 1심에서만 53차례를 포함, 70여차례나 재판에 불려 다녔다. 증인 신문이 길어지면서 날짜를 넘기기도 부지기수였고, 집중 심리로 진행됐음에도 첫 공판준비기일부터 선고까지는 170일이 걸렸다. 두 개의 재판이 동시에 진행되며 피고인 출석 의무가 있는 공판 기일이 얼마나 잡힐지 예측할 수 없기 때문에 이재용 체제는 시작부터 경영 공백이 불가피해졌다. 산업계 관계자는 이 부회장이 국정농단 재판을 받고 수감되는 과정에서 투자는 물론, 일상적 프로젝트도 거의 올스톱된 상태였다. 삼성과 연관된 사업을 펼치는 협력사가 얼마나 많으냐. 끔찍한 보릿고개였다고 전했다.

 

대외적 환경도 썩 좋지 않다. 코로나19 장기화로 인한 경기 침체는 계속되고 미·중 무역갈등과 이에 따른 제재 공방전으로 불확실성이 지속되고 있어서다. 이런 가운데 각국의 보호무역주의와 환경 규제는 날로 강해지고 IT기업을 중심으로 대규모 인수합병(M&A)이 단행되며 산업 지형을 요동지고 있다. 아베 전 총리의 후계자를 자청한 스가 신임 내각의 우익 성향은 제2의 반도체 핵심 소재 수출규제로 이어질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신기술 경쟁이 가속화됨에 따라 특허 괴물로 불리는 특허관리전문회사(NPE)과의 소송도 부쩍 늘었다. 이로 인해 삼성전자는 2·3분기 코로나19 확산세 속에서도 시장 전망을 뛰어넘는 실적을 달성하며 건장한 체력을 과시했음에도 다음 분기는 예단할 수 없다며 몸을 사렸다.

 

선택과 집중으로 뉴삼성 정체성 선명해질 듯

 

이건희 회장은 1987년 취임 해 삼성을 세계 굴지의 기업으로 키워냈다. 매출은 10조원에서 2018년 기준 387조원으로 약 39배 늘었고, 영업이익은 2000억원에서 72조원으로 359, 시가총액도 1조원에서 396조원으로 396배나 뛰었다. IMF 외환위기와 글로벌 경제위기 속에서도 이룬 성과다.

 

이 부회장도 대내외 악재에 선제적으로 대응하고 신사업에 도전, 미래 가치를 만드는 기업으로 만들기 위한 노력을 기울일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한 구상도 이미 밝혔다. 그는 대국민사과를 통해 삼성전자는 기업의 규모로 보나 IT업의 특성으로 보나 전문성과 통찰력을 갖춘 최고 수준의 경영만이 생존을 담보할 수 있다끊임없는 혁신과 기술력으로 가장 잘 할 수 있는 분야에 집중하면서도 신사업에 과감하게 도전하겠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선택과 집중을 통해 뉴삼성의 정체성을 선명히 하고 퀸텀점프의 발판을 다지는 데 매진할 전망이다.

 

선택과 관련해서는 비주력사업의 매각이 거론된다. 건설과 패션, 생명 등이 대표적이다. 업황을 타는데다 수익성 측면에서도 썩 만족스럽지 않고 관련법 개정 등으로 재편의 필요성이 제기되는 사업들이다. 앞서 화학·방산 등 비주력사업을 과감히 정리했던 만큼, 이 부회장이 비주력사업 중 우선순위를 정해 매각한 뒤 이를 핵심사업에 투자할 가능성이 제기된다.

 

신성장 동력에 대한 집중은 강화된다. 이 부회장은 시스템 반도체와 바이오, 전장부품, 5G(5세대 이동통신), AI(인공지능)를 차기 먹거리로 찍었다. 20188180조원 투자·4만명 채용을 발표하면서 AI·5G·바이오·전장부품 신성장동력으로 선정해 본격적으로 투자하기 시작했다.

 

이듬해 4월에는 반도체 비전2030을 발표하고 133조원을 투자해 2030년 시스템반도체 세계 1위 달성을 위한 청사진을 제시했다. 같은 해 10월 퀀텀닷디스플레이 13조원을 새롭게 투자하겠다고 밝혔다.

 

올해 들어서 반도체 투자에 공격적이다. 연초 화성캠퍼스에 극자외선(EUV) 전용 V1 라인을 준공한 데 이어 지난 5월과 6월에는 세계 최대 반도체 공장인 평택캠퍼스 2라인에 EUV 공정 기반 파운드리 생산라인을 착공하고, 낸드플래시 생산라인도 건립하기로 했다. 9월에는 평택캠퍼스 P3 라인 공장 터 다지기에 들어갔다.

 

미래 반도체 기술 확보에 더욱 적극적으로 나설 전망이다. 특허정보 분석업체 페이턴트피아(Patentpia)’에 따르면, 삼성전자의 AI·빅데이터 기술 관련 반도체 특허공개량은 228건으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았다. 특허공개량은 해당 기술을 개발했다고 각 기업들이 공개해놓은 수치로 특허 출원과 유사한 의미로 해석된다. 2014년 이후부터 매년 AI 반도체와 관련된 기술 특허를 두자릿수 이상 출원했고, 등록이 완료된 특허도 총 77건으로 1위를 차지했다. 미국에서도 삼성전자는 AI 반도체 관련 기술 특허를 총 101건 보유해 IBM(180), 인텔(127), 퀄컴(109)에 이어 외국기업 중에선 가장 많은 관련 특허를 가진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SoC(시스템온칩), 영상시스템, 자동차용 등 시스템반도체 전체 특허 등록량에서도 3010건으로 국내 1위를 차지했다.

 

특히 이 부회장이 집중하는 사업들은 미래 성장 가능성이 높기도 하려니와, 이 부회장의 관심과도 맞닿은 사업들이다. “이 부회장이 그룹 회장보다는 삼성전자의 회장을 하고 싶어 한다는 최지성 전 미래전략실장의 말은 이 부회장의 첨단기술에 대한 관심을 보여준다.

 

이에 따라 전자와 IT를 중심으로 사업을 재편하고 미래 반도체와 전기차 배터리, 자동차 전장, 사물인터넷(IOT), AI 등에서 투자와 인재 영입이 더욱 활발해질 것으로 예상된다. 이 과정에서 2016년 하만 인수 이후 멈췄던 인수합병(M&A)가 재개될 가능성이 높다.

 

스페셜경제 / 변윤재 기자 purple5765@speconom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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